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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과 시각/에너지분야

석유 체제의 종말



당초 튀니지의 시민혁명에서 촉발된 중동지역의 민주화 요구가 리비아 사태를 기점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종교의 갈등으로, 때로는 정치와 민주적 가치의 문제로, 또는 문명의 이견으로 보이는 중동지역의 긴장과 전쟁의 배후에는 사실 언제나 석유에 대한 쟁탈의 이해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중동에서의 분쟁을 석유 쟁탈 대리전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하여 어떤 이는 미국이 북한에는 석유가 없기 때문에 북한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 아닌 분석을 내 놓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전쟁과 비극도 석유와 천연가스를 두고 벌어지는 일종의 ‘게임’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생태학적인 문명비평가 ‘제레미 레프킨’은 지난 세기의 1차, 2차 세계대전은 바로 대규모의 석유쟁탈전이었다는 분석을 그의 저서 ‘수소혁명’에서 논증했다. 실제로 이후 모든 전쟁의 면면을 상세히 살펴보면 석유가 언제나 전쟁의 배면에 있었다. 기실 민주주의, 자유, 해방의 가치가 전쟁의 명분이 된다는 주장 자체가 터무니없는 정치학의 모순과 역설인 것을 석유 쟁탈전이 말해 주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문명은 석탄과 석유의 발견과 대량의 채굴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반생태적인 탄소문명이었다. 탄소의 대량배출은 선진국의 표상이었으며, 또한 이것은 배타적인 에너지의 사용을 통해 다른 나라와 민족에 대한 극심한 자유의 억압과 경제적인 불평등, 저성장을 강제하는 꼴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예는 지구 곳곳에서 비극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나이제리아강 델타’는 아프리카 최대의 석유생산지 중에 한곳이다. 한국도 이곳에서 원유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석유의 생산이 이 지역의 원주민에게는 고통과 배신의 끈이 되었다. 실상 삶의 토대를 거대 석유기업 ‘쉘’에게 빼앗긴 그들이 해적이 되었다고 또는 민족해방반정부군이 되었다고 그들을 비판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  송유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주식이 돼 버린 나무뿌리를 굽고 있다. 석유가 많이 나는 나라지만 원주민들의 삶은 이전보다 더 어려워 지고 있다.


군사독재정권을 부추켜 원주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시인이자 환경운동가였던 ‘사로위와’를 사형시킨 석유자본의 이해가 먼 아프리카의 전설이 아닌 오늘 우리의 석유문명을 뒷받침 하고 있다. 

오히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탁월한 아동문학가이자 생태철학자이셨던 권정생 선생은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석유를 낭비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이라크 전쟁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일갈하셨다. 그의 근본론적인 문명비판에 대한 반론도 있을 수도 있으나 현생의 인류가 역사속에 유래가 없는 생태적인 재앙에 직면하고 있다는 직시에 이르면 그의 실토가 과언이 아닐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은 국제적인 석유쟁탈전쟁에 언제나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잊고 있다. 한국은 세계의 석유전쟁에 유수한 이해당사국이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의 나라가 된 것이다. 

그것은 석유 총량의 소비에서 이미 한국은 세계 5위국이 되었으며, 화석연료의 소비로 인한 이산화탄소의 배출이 9위, 에너지소비 증가율 1위, OECD국가 중 에너지 사용효율이 가장 낮은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화석연료는 값싼 무한의 자연자원으로 인식되고 대량으로 채굴되고 빠르게 소모시켜왔다. 석유체제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의 물적토대이다. 그러나 생태계는 식물 동물 자연의 각각의 기능과 역할이 적절하게 배분되고 고유의 환경용량을 가진 유기적 관계망을 가지고 있다. 

그 속에 인간의 진실한 운명이 있다는 것을 근대의 문명은 미혹하였다. 근대 의 정신이라는 것을 촉발한 베이컨의 “자연은 인간을 위한 노예와 같다”라는 지적이 실은 인간 이성에 대한 과잉한 믿음, 관계에 대한 무지라는 것을 현대의 외롭고 비루한 삶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석유체제의 정치가 민주주의를 망가트리고 있다. 석유체제의 과잉생산이 경제의 근간을 흔들면서 세계 경제를 위협하고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 소비중독은 석유체제의 특징이 되고 있다. 석유체제는 지역중심의 발전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생태학적인 이성의 회복을 통한 새로운 발전의 기획이 21세기 인간이 스스로의 면모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석유체제로서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룩한 한국과 그 첨단에 있는 울산의 미래가 불안하고 그런 점에서 다각적인 논의가 촉발되어야 할 상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자상 기후변화 에너지대안센터 대표 >